내셔널 사커 리그 (오스트레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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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셔널 사커 리그(NSL)는 1977년부터 2004년까지 존재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최상위 남자 축구 리그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축구의 수준 향상을 목표로 세미프로 리그로 출범했으나, 재정 문제와 민족 간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5-06 시즌부터는 A리그로 개편되었다. NSL은 초기에는 시드니 시티가 강세를 보였으며, 이후 퍼스 글로리, 시드니 유나이티드, 울릉공 울브스 등이 지역 밀착형 팀 운영으로 명문 팀으로 성장했다. 리그는 다양한 경기 방식과 승점 시스템을 거쳤으며, 재정 파탄, 이민자 출신 클럽 간의 갈등, TV 중계권 문제 등으로 쇠퇴했다. NSL의 마지막 골은 2003-04 시즌 파라마타 파워 SC를 상대로 닉 므르자가 기록했다.
클럽 간의 경쟁은 NSL이 결성되기 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1957년 석유 회사 암폴(Ampol)이 뉴사우스웨일스주를 시작으로 각 주에서 컵 대회를 후원했고, 다른 주에서도 뒤이어 대회를 열었다.[8] 1960년대 내내 전국 암폴 컵이 개최되었고,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호주 컵이 개최되었지만,[9] FA컵 스타일의 토너먼트 대회는 실현되지 못했다. 1970년대에는 멜버른과 시드니의 상위 팀들이 시즌 말에 경기를 치렀지만,[10]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NSL의 경기 방식은 리그 역사 동안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77년부터 1983년까지는 단순한 승점제가 적용되었으나, 전통적인 승점제와 호주식 결승전 방식 사이의 절충안이 고안되었다. 1978년, 1979년(2차전 결승전), 1980년, 1982년에는 결승전이 진행되었지만, 결승전 우승자가 리그 우승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2. 역사
전국 홈 앤드 어웨이 리그 계획은 1967년 시작을 목표로 1965년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며,[11]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도 이와 유사한 계획들이 있었지만, 클럽과 주 협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1974년 FIFA 월드컵 호주 대표팀의 선전은 전국적인 축구 리그 창설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2] 1977년, 마침내 14개 팀이 참가한 내셔널 사커 리그(NSL)가 출범하며 호주 축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NSL은 여러 차례 개편과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시드니 클럽들이 강세를 보였으나, 1984년에는 관중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리그를 두 개의 컨퍼런스로 분할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단일 리그로 복귀했지만, 1989/90 시즌부터는 여름 시즌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 등 다른 인기 스포츠와의 경쟁을 피하고자 했다.
1990년대에는 축구 당국의 주도로 클럽들이 이민자 팬층이 아닌 주류 호주 사회를 대상으로 마케팅하도록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클럽들이 팀명과 로고를 변경해야 했고, 민족 깃발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
1996년부터는 퍼스 글로리를 비롯한 새로운 클럽들이 등장하며 리그 활성화를 꾀했지만, 2001년 FIFA 클럽 선수권 대회 취소와 주축 선수들의 해외 진출, TV 중계권 문제 등으로 인해 리그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결국 NSL은 2003-04 시즌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2005년 A-리그가 출범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축구는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OFC)에서는 강했지만, FIFA 월드컵 본선에는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오랫동안 진출하지 못했다.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을 통과해도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했기 때문) 또한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에 밀려 리그 관중 동원도 저조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축구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세미프로 조직인 NSL이 창설되었다.
리그 말기에는 퍼스 글로리 FC, 시드니 유나이티드 FC, 울릉공 울브스 등이 지역 밀착형 팀 운영을 추진하며 리그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후 재정 파탄, 민족 갈등 심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수준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2005-06 시즌부터 8개 팀으로 구성된 완전 프로 리그인 '''A-리그'''로 개편되었다. A-리그는 '지역성'을 강조하고 1도시 1팀 원칙을 도입하여 민족 갈등 요소를 제거했다. A-리그의 스폰서로는 대한민국의 현대자동차와 리복 등이 참여했다.[33] NSL은 누적 적자가 약 400억 엔에 달했고, 정부 보조금 사용도 불투명했다.[33] 또한 NSL 클럽 대부분이 이민자 팀이었기 때문에 경기 중 서포터 간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34]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협회는 팀명에 민족적 유래를 나타내는 이름을 금지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34]
2003년에 취임한 프랭크 로위[35]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협회 회장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NSL을 해체하고 2004년 11월에 A-리그를 출범시켰다. A-리그는 일본의 J리그처럼 '지역성'을 강조하고, 1도시 1팀 원칙을 적용하여 민족색이 강한 팀을 배제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개선했다. A-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NSL 팀들은 규모를 축소하여 독자적인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다. A-리그는 2005년 8월부터 리그전을 시작하여 평균 관객 1만 명을 기록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축구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성공했다.
2. 1. 초기 (1977-1983)
1974년 FIFA 월드컵 호주 대표팀의 선전은 전국적인 축구 리그 창설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2] 1977년, 14개 팀이 참가한 내셔널 사커 리그(NSL)가 출범하며 호주 축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12]
주 기반 리그에서 전국 대회로 전환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빅토리아 축구 협회(Football Federation Victoria)는 빅 클럽들의 참여를 꺼렸고, 세인트 조지 FC(St George)의 알렉스 폰그라스(Alex Pongrass)와 하코아 시드니 시티 이스트 FC(Hakoah Sydney)의 프랭크 로위(Frank Lowy)가 구상했던 전국적인 클럽 대회의 실현은 어려워 보였다.[13] 그러나 멜버른 외곽 동부 교외의 무룰바크 축구 클럽(Mooroolbark)이 대회에 참여하면서 교착 상태를 깨고, 다른 세 개의 빅토리아 팀들을 끌어들여 전국 리그를 현실화했다.[13]
리그 초기 7시즌은 시드니 클럽들이 주도했다. 시드니 시티는 4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초기 NSL을 대표하는 강팀으로 자리매김했다.[13] 웨스트 애들레이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외 지역에서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팀이었다.
2. 2. 컨퍼런스 시스템 도입과 변화 (1984-1986)
1984년, 관중 감소에 대응하고 더 많은 팀을 리그에 포함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리그는 두 개의 컨퍼런스로 분할되었으며, 각 컨퍼런스의 우승팀은 연말에 2차전 결승전을 치렀다. 1984 시즌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컨퍼런스에 뉴사우스웨일스와 ACT 팀이, '내셔널' 컨퍼런스에는 빅토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및 퀸즐랜드 클럽이 참가했다. 1985년과 1986년에는 '노던' 컨퍼런스와 '사우스' 컨퍼런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특이하게도, 지리적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브리즈번 라이언스와 브리즈번 시티는 '사우스' 컨퍼런스에 속했다.[16]
이 시기에 사우스 멜버른이 빅토리아 팀 최초로 리그에서 우승했고, 브런즈윅 유벤투스와 애들레이드 시티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우스 컨퍼런스 소속이었다.[16] 1986 시즌을 끝으로 컨퍼런스 시스템은 폐지되었고, 팀의 절반가량이 각 주 리그로 강등되었다. 잔류 팀과 방출 팀을 결정하는 기준은 1986년 경기 기록 50%, 과거 경기 기록 40%, 관중 수 10%였다.[16] 그 결과, 시드니와 멜버른 외 지역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인 애들레이드 시티만이 유일하게 리그에 잔류했다.[16]
2. 3. 단일리그 복귀와 겨울 축구 (1987-1989)
1987 시즌, 리그는 개편되었으나 시즌 시작 후 단 한 라운드 만에 시드니 시티가 대회에서 철수하면서 큰 차질을 겪었다.[16] 리그는 단일 디비전으로 복귀하는 동시에 결승전을 폐지하고 정규 리그 1위 팀에게 우승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결정이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기를 없앤 것이라며 신중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7] 1988년부터 결승전은 다시 도입되었고, 리그가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89 시즌은 겨울에 치러지는 마지막 시즌이었다. 이 기간 동안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지배력이 다시 나타나 모든 타이틀, 소수 우승 및 준우승이 해당 주에서 나왔다.
2. 4. 여름 축구 도입과 전환기 (1989-1996)
1980년대 초부터 리그를 여름 시즌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1989/90 시즌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간단했다. 리그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와 오스트레일리안 럭비 리그 시즌이 한창일 때 미디어에서 소외되는 것을 피하고, 더 나은 날씨로 인해 더 좋은 경기장과 관중 편의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으로 인해 리그에 가해진 추진력은 일부 클럽이 리그에 잔류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전 챔피언인 브런스윅 유벤투스, 세인트 조지, APIA 레이크하르트를 포함하여 많은 클럽들이 강등되거나 주 리그로 강등되었으며, 한때 하이델베르크와 프레스턴의 경쟁자들이었다.
이는 축구 당국이 클럽이 주로 이민자 팬층이 아닌 주류 호주 사회를 대상으로 마케팅하도록 강요하려는 새로운 움직임과 일치했다. 이러한 정책에는 이름 및 로고 변경, 민족 깃발 금지 등이 포함되었으며, 클럽은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지만, 관중석에서는 팬들이 일반적으로 이전 이름을 계속 외쳤다.[1] 마르코니, 사우스 멜버른, 애들레이드 시티와 멜버른 나이츠가 이 시대의 주도적인 팀이었으며, 수많은 타이틀과 결승전 출전을 기록했다.
마크 비두카, 마크 브레시아노, 빈스 그렐라, 토니 포포비치, 마크 슈워처와 같은 스타들이 이 10년에 데뷔했고, 이후 호주 황금 세대의 핵심을 형성하게 된다.
2. 5. 새로운 클럽들의 등장과 성장 (1996-2001)
1996년부터 리그는 퍼스 글로리와 같은 서호주 팀을 포함시키고, 주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를 통해 리그를 활성화하려 했다.[18] 콜링우드 워리어스, 칼튼, 노던 스피릿, 파라마타 파워, 그리고 뉴질랜드 최초의 프로팀인 풋볼 킹즈와 같은 새로운 클럽들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 클럽들은 경기장 안팎에서 다양한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 콜링우드 워리어스는 한 시즌 만에 사라졌고, 칼튼은 데뷔 시즌에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많은 팬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노던 스피릿은 초반에 많은 관중과 함께 좋은 성적을 거두며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점차 관중이 감소했고, 레인저스의 논란이 많은 인수가 상황을 악화시켰다.[18] 파라마타 파워는 이미 축구 클럽이 많은 서부 시드니에 위치하여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반면, 퍼스 글로리는 새로운 주류 진입자 중 가장 성공적인 팀이었다. 퍼스 글로리는 NSL의 마지막 10년 동안 높은 관중과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호주 최고 수준의 리그에 진입하려는 팀들의 벤치마크이자 롤모델이 되었다.
2. 6. 쇠퇴와 A리그 출범 (2001-2004)
2001년 FIFA 클럽 선수권 대회가 취소되면서 내셔널 사커 리그(NSL)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많은 유명 호주 선수들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해외 리그로 떠났다.[19]
1998년, 호주 축구 협회는 NSL과 소케루스 경기의 텔레비전 중계권을 세븐 네트워크에 연간 250만달러 규모의 10년 계약으로 판매했다. 세븐 네트워크는 이 중계권을 유료 TV 스포츠 채널인 C7 스포츠의 주력 프로그램 중 하나로 활용하려 했다.[19] 그러나 지상파 방송에서는 매우 적은 경기만 중계되었고, 2000년에는 수요일 자정 이후에 한 시간짜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만 방영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세븐 네트워크가 90년대에 번창했던 리그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죽였다고 믿었다.
2002년, 세븐 네트워크가 호주 풋볼 리그(AFL) 중계권을 잃고 유료 TV 네트워크가 채널 방송을 중단하면서 C7 스포츠가 문을 닫았다. 이듬해 세븐 네트워크는 호주 축구 협회가 해산되기 직전에 계약을 해지했다. 이로 인해 NSL은 특선 방송 서비스(SBS)가 중계권을 인수할 때까지 TV 중계를 전혀 받지 못했다.
스폰서십 부족은 리그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고,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리그는 막을 내렸다. 시드니 올림픽 FC가 10년 만에 두 번째 타이틀을 획득하고, 퍼스 글로리 FC가 마지막 두 번의 NSL 타이틀을 획득했다.
마지막 NSL 시즌 직전에 철수한 애들레이드 시티를 대체하기 위해 설립된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FC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애들레이드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관중을 동원했다.
2003-04 시즌 리그는 2004년 4월 4일 파라마타 파워 SC를 상대로 1-0으로 승리한 퍼스 글로리가 우승했다. 닉 므르자는 퍼스의 챔피언십을 확정짓는 98분 골든 골을 넣어 NSL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전국 대회는 중단되었다. 2004년 11월, 해체된 NSL 소속 5개 팀을 포함한 8개 팀이 새로운 전국 대회인 A-리그를 결성했다. A-리그는 입찰 과정과 1도시 1팀 규칙으로 인해 많은 팀이 참여 기회를 잃었다. 첫 번째 대회는 2005년 8월 26일에 시작되어 NSL과 24년 역사를 종식시켰다.
오랫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축구는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OFC)에서는 강했지만, FIFA 월드컵 본선에는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오랫동안 진출하지 못했다.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을 통과해도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했기 때문) 또한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에 밀려 리그 관중 동원도 저조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축구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세미프로 조직인 NSL이 창설되었다.
리그 말기에는 퍼스 글로리 FC, 시드니 유나이티드 FC, 울릉공 울브스 등이 지역 밀착형 팀 운영을 추진하며 리그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후 재정 파탄, 민족 갈등 심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수준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2005-06 시즌부터 8개 팀으로 구성된 완전 프로 리그인 '''A-리그'''로 개편되었다. A-리그는 '지역성'을 강조하고 1도시 1팀 원칙을 도입하여 민족 갈등 요소를 제거했다. A-리그의 스폰서로는 대한민국의 현대자동차와 리복 등이 참여했다.[33] NSL은 누적 적자가 약 400억 엔에 달했고, 정부 보조금 사용도 불투명했다.[33] 또한 NSL 클럽 대부분이 이민자 팀이었기 때문에 경기 중 서포터 간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34]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협회는 팀명에 민족적 유래를 나타내는 이름을 금지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34]
2003년에 취임한 프랭크 로위[35]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협회 회장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NSL을 해체하고 2004년 11월에 A-리그를 출범시켰다. A-리그는 일본의 J리그처럼 '지역성'을 강조하고, 1도시 1팀 원칙을 적용하여 민족색이 강한 팀을 배제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개선했다. A-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NSL 팀들은 규모를 축소하여 독자적인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다. A-리그는 2005년 8월부터 리그전을 시작하여 평균 관객 1만 명을 기록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축구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성공했다.
3. 경기 방식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리그는 두 개의 컨퍼런스로 나누어 운영되었다.
각 컨퍼런스에는 12개 팀이 소속되었으며, 각 디비전 상위 5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각 디비전 플레이오프 우승팀은 2차전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1987년 리그는 11개 팀을 정리하고 디비전 분할을 폐지했으며, 챔피언십 시스템은 다시 승점제로 돌아갔다.
1988년 리그는 다시 결승전 시스템을 도입하여 상위 5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92/93 시즌에는 결승 진출 팀을 6개로 늘렸다. 이 시스템은 2002/03 시즌을 제외하고 리그가 지속되는 동안 사용되었으며, 해당 시즌에는 상위 6개 팀이 서로 홈 앤드 어웨이 경기를 치른 후 상위 2개 팀이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NSL은 역사상 다양한 승점 시스템을 사용했다.
시즌 | 승리 | 무승부 | 패배 | 비고 |
---|---|---|---|---|
1977년 ~ 1991/92 시즌 | 2점 | 1점 | 0점 | |
1979년 | 2점 | 1점 | 0점 | 4골 이상 차이 승리 시 보너스 점수 |
1983년 | 3점 | 1점 | 0점 | |
1992/93 시즌 | 3점 | 1점 | 0점 | |
1994/95 시즌 | 4점 | 2점 (승부차기 승) 1점 (승부차기 패) | 0점 | 무승부 시 승부차기 |
4. 문제점과 한계
NSL(내셔널 사커 리그)은 여러 문제점에 직면했다. 우선, 리그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1970년대부터 2004년까지 NSL의 누적 적자는 일본 엔으로 약 400억 엔에 달했다.[33] 매년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했지만, 그 사용처는 불투명했다.
또 다른 문제는 대부분의 NSL 클럽이 이민자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대도시에서는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별 클럽이 경쟁했고, 이는 경기 중 서포터들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크로아티아계 이민자 팀인 시드니 유나이티드(구 시드니 크로아티아)와 그리스계 이민자 팀인 시드니 올림픽의 경기에서는 크로아티아계와 그리스계 이민자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러한 민족 갈등은 일반 호주 국민들에게 축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화시켰다. 축구는 폭력적이고 민족색이 강한 이민자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협회는 1990년대부터 팀명에 민족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도시명" 또는 "도시명 + 애칭"으로 변경하도록 했지만,[34]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5. 대한민국과의 관계
Hyundai Motor Company|현대자동차영어는 2005년 출범한 A리그의 주요 스폰서로 참여하며, 한국과 호주 축구 교류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33]
6. 역대 우승 클럽
클럽 | 우승 | 준우승 | 우승 연도 |
---|---|---|---|
시드니 시티 | 4 | 3 | 1977, 1980, 1981, 1982 |
마르코니 스탤리온스 | 4 | 3 | 1979, 1988, 1989, 1992–93 |
사우스 멜버른 | 4 | 2 | 1984, 1990–91, 1997–98, 1998–99 |
애들레이드 시티 | 3 | 2 | 1986, 1991–92, 1993–94 |
시드니 올림픽 | 2 | 4 | 1989–90, 2001–02 |
멜버른 나이츠 | 2 | 3 | 1994–95, 1995–96 |
퍼스 글로리 | 2 | 2 | 2002–03, 2003–04 |
울런공 울브스 | 2 | 0 | 1999–00, 2000–01 |
세인트 조지 | 1 | 1 | 1983 |
브리즈번 스트라이커스 | 1 | 0 | 1996–97 |
APIA 레이크하트 | 1 | 0 | 1987 |
브런즈윅 유벤투스 | 1 | 0 | 1985 |
웨스트 애들레이드 | 1 | 0 | 1978 |
시드니 유나이티드 | 0 | 3 | |
하이델베르크 유나이티드 | 0 | 2 | |
프레스턴 라이온스 | 0 | 1 | |
칼튼 | 0 | 1 | |
파라마타 파워 | 0 | 1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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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ague far from the big le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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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 has to get its act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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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n:Frank_Lowy|フランク・レービwiki英語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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